세기박이야기

4-3. 전쟁중이라서 행운이었다.

작성자 정보

  • 최고관리자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이스라엘에서 우리 가족이 살던 집은 2층 구조였는데, 1층에는 거실과 부엌이 있고 마당에는 작은 수영장도 있었다. 2층에는 방이 4개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는 전쟁시 대피실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창문은 작은 것 하나 뿐이었는데, 전쟁시에는 두께가 2cm나 되는 철판을 닫을 수 있도록 미리 설치되어 있었다.

전쟁은 실제로 일어났다. 이스라엘에 부임한 해 9월에 제2차 팔레스타인 봉기(인티파다)가 일어나 4년 내내 테러와 보복으로 이스라엘 전역에서 4,0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2년째에는 이라크 사담 후세인이 이스라엘과 전쟁을 일으켜 구급약품과 전쟁식량을 대피실에 쌓아 두어야 했다. 그리고 철판 창문을 닫은 후 두꺼운 비닐로 밀봉하고, 빈틈이 없도록 테이프를 붙여야 했다. 아이들은 학교에 갈 때 이스라엘 정부가 대사관을 통해 지급해 준 방독면을 어깨에 메고 갔고, 어른들은 항상 자동차에 싣고 다녔다. 그 중에서도 위급한 상황이 계속된 두 달 동안은 모든 학교들이 휴학을 했고, 아내와 자녀들도 본부 지침에 따라 그리스로 피난을 떠났다. 직원들은 이스라엘 남쪽 끝 에일랏으로 피난을 떠났고, 관장인 나는 텔아비브와 예루살렘 중간에 있는 한 시골 키부츠로 대피했다.

 

두 개의 전쟁을 동시에 겪게 된 이스라엘은 인명 피해도 심했지만, 그 많던 성지순례객들이 사라지는 바람에 경제적 어려움이 더 심했다. 한 할머니는 음식 살 돈이 없어서 죽은 남편의 강보를 들고 나와 골목 어귀에 서 있었다. 나는 그게 뭐냐고?’ 물었지만 의사 소통이 잘 안 되었다. 길을 가던 사람의 도움으로 그것이 강보라는 것을 알고 일단 돈을 지불했는데, 1934년에 만들어진 그 강보는 길이가 285cm나 되었고, 아기 이름과 축복문이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 다음 주에는 한 청년이 길거리에서 이걸 팔아야 우리 가족이 끼니를 이을 수 있으므로 제발 사 달라고 애원하였는데, 그 물건은 청년 아버지의 유품이었다. 알루미늄판으로 만든 작은 상자에 배 그림과 히브리어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는데, 사연을 들어 보니 정말 기가 찬 물건이었다.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 벤 바루크는 이스라엘이 독립하기 전인 1947년에 유럽에서 팔레스타인으로 밀항하였는데, 그만 하이파 항구에서 영국군에게 붙잡혀 지중해의 키프로스 수용소로 끌려 가고 말았다. 그는 수용소에서 주운 비행기 파편으로 손바닥보다 작은 보석상자를 만들고, 거기에다 귀향의 꿈을 새겼다고 한다. 과연 보석상자 뚜껑에는 지중해에 배가 떠 있는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나중에 국제 여론이 유리하게 작용하여 아버지는 큰 배를 타고 팔레스타인으로 돌아 왔는데, 그 감동적인 스토리가 바로 영광의 탈출이라는 영화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 배에 탄 611명의 주인공 중에 아브라함 벤 바루크가 있었던 것이다.

내가 그 청년에게 얼마에 팔 것이냐?’고 물었더니 ‘150세겔(6만원)을 달라고 했다. 나는 그에게 용기를 가지라고 격려하면서 300세겔을 추가로 더 주었다. 그리고 그 보석상자는 박물관 홀로코스트 코너에 지금도 잘 전시되어 있다.

성경에는 족보 이야기가 많이 나오므로 유대인의 족보책도 구해야 했다. 그런데, 누가 감히 자기집 족보를 내다 팔겠는가. 내가 하도 족보, 족보 하고 다니니까 한 골동품점 주인은 자기집 족보를 복사해서 나에게 주었다. 그런데 나는 복사한 것 말고, 오리지널 족보가 필요하였다.

그런데 그날이 왔다. 한 젊은 사람이 일곱촛대 모양으로 그려진 조부모 족보(family tree)를 들고 나온 것이다. 거기에는 1917년에 태어난 할아버지와 1919년에 태어난 할머니가 결혼하여 두 자녀를 낳았고, 자부와 4 손주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족보였다.

 

지금은 지나간 일이라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지만, 이스라엘 근무 기간 중에는 사실 하루하루가 살벌했다. 실제로 히브리대 식당에서 테러가 발생하여 거기서 식사하던 한국 유학생 3명이 크게 다쳤다. 상당히 회복된 후 병문안이 허용되었을 때 우리 가족도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갔다가 다녀 온 적이 있다.

이런 테러 폭발은 만원 버스나 쇼핑몰에서 자주 발생했으므로 쇼핑몰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가방과 주머니를 다 비운 후 검색대를 통과해야만 했다. 이 검색이 너무 엄격해지니까 나중에는 검색 대기 줄에서도 테러가 일어났다.

출근할 때는 앞이나 뒤에 버스가 오지 않도록 운전을 잘 해야 했다. 내 뒤에 버스가 따라오는 것이 보이면 신호등에서 앞차와 넉넉한 거리를 두고 정차했다가 버스가 선 후에 내 차를 앞으로 슬며시 당겨 버스와의 거리를 최대한 멀게 해야 안전했다.

이런 위험은 내가 이스라엘에 근무하는 기간 내내 이어졌으므로 이스라엘에서 골동품을 사 가는 고객은 거의 없어졌고, 바로 그 점이 나에게는 호기가 되었다. 동전이나 등잔과 같은 골동품의 가격은 크게 떨어졌고, 제대로 된 물건을 고를 수도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성경 물건이 흔하거나 쉽게 구할 수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성경 물건들은 가게에서 사기 보다 발품을 팔아야 만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전역을 다니면서 아무라도 붙잡고 그 집안으로 따라 들어가 물건을 찾아 내거나, 전화번호를 주면서 이런저런 물건이 발견되면 연락해 달라고 말해 두어야 했다. 그렇게 하여 하나 둘 모은 것들이 탈무드, 이혼증서, 물매, 과부옷, 할례도구, 포도주 병, 이스라엘 국기 등이다.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최근글


  • 글이 없습니다.

새댓글


  • 댓글이 없습니다.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