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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뉴질랜드에서 경험한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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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다음에 근무한 나라는 뉴질랜드이다. 본부에서 요직 근무를 한 다음이라 해외근무지 선택 우선권을 가진 나는 뉴질랜드를 택하였다. 폴란드에서 고생을 한 데다 마침 뉴질랜드 이민 열풍이 불어 솔직히 한 번 가서 살아보고 싶었다. 그리고 영연방 기독교 국가인 만큼 성경 유물도 많이 수집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뉴질랜드는 과연 아름답고 신선한 나라였다. 길거리에서 만나는 낯선 사람끼리도 인사를 나누었고, 학교 운동장이 잔디밭으로 이루어져 아이들은 맨발로 뛰어 다녔다. 개인적으로는 아침 일찍 리뮤에라 골프장으로 나가 9홀을 돌고 출근해도 되는 그런 곳이었다.

그러나 뉴질랜드는 성경유물 수집 면에서는 꽝이었다. 3년 내내 수집한 것이 교회학교 슬라이드 필림 3, 그것 뿐이었다. 굳이 추가한다면 전시보조품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고물 서랍장과 의자가 있는데, 의자는 사무실에서 쓰다가 지금은 박물관 유월절 체험장에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서랍장은 박물관 입구에 두고 그 위에 브로슈어와 소품을 전시하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뉴질랜드에서는 큰 복덩이를 하나 안고 들어왔다. 바로 우리 다섯째 딸 은수이다. 첫째 딸 희정은 1981년 서울 망원동에서 낳아 할머니가 이름을 지어 주었고, 둘째 딸 희영은 1983년 오만 무스카트에서 낳아 할아버지가 이름을 지어 주었다. 셋째 딸 한나는 1986년 대구에서 낳아 또 할머니가 이름을 지었고, 넷째 딸 성수는 19881225일 새벽에 송파동에서 낳아 내가 거룩할 성()자를 넣어 이름을 지었다.

아내는 결혼 당시 씩씩하기는 했지만 몸은 허약하여 겨울이 오면 정말 두꺼운 옷을 입고 다녔다. 다리가 얼마나 차가운지 잠을 자다가 서로 부딪히면 내가 잠을 깰 정도였다. 숨결도 약하여 코에 귀를 갖다 대어야 숨소리가 들릴 정도여서 어떤 때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흔들어 보아야 했다.

오클랜드에서 우리 가족은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의 코히마라마 현지인 장로교회에 다녔다. 주일 아침에 온 가족이 깨끗한 옷을 입고 교회로 내려가는 길은 1년 내내 새들이 지저궜고 꽃으로 아름다왔다. 국문과를 나온 나는 그 길을 걸으면서 종종 서양 소설에 나오는 장면들을 떠올리곤 했다.

바다가 가까운 숲속 예배당도 아름다왔다. 작고 하얀 건물에서 울려 나오는 영어 찬송 소리는 한국어 찬송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예배가 끝나면 언제나 오찬을 나누었고, 우리도 때로는 음식을 준비해 갔다. 성도들은 홍콩 여자 하나 외에는 모두 뉴질랜드 현지인들이었고, 장로 한 명이 우리 집에 심방도 왔다.

그런데, 그 교회에서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예배가 너무 냉랭하여 심령이 갈급해진 것이다. 결국 1년쯤 후에 우리는 오클랜드순복음교회로 교적을 옮겼고, 새해가 되자 구역장도 바뀌었다. 새 구역장은 예수님을 믿은지 1년도 안 된 이민자로서 첫날 구역예배를 시작하기 전에 말했다.

저는 초신자라서 성경도 잘 모르고, 잘 할 수 있는 것은 기도 뿐입니다. 제가 1주일 동안 열심히 기도를 해 드릴 테니 가정별로 기도 제목을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둘러 앉은 사람들이 기도받을 제목을 말할 때 우리 부부는 별 생각 없이 순서를 기다렸다. 특별히 기도받을 만한 문제나 아쉬움이 없어서 오히려 당황했다. 드디어 우리 순서가 되었고, 아내와 나는 서로 얼굴을 쳐다 보면서 무어라고 말해야 할지 망설였다.

그러다가 내가 갑자기 소리쳤다.

당신 손발 차잖아요

구역장은 아무 말없이 메모를 하면서

제가 사모님 손발이 따뜻해지도록 기도하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우리는 그 일을 잊어 먹고 지내다가 다음 주 구역예배에 갔더니 구역장은 지난 주간에 기도를 많이 했으니 손을 한 번 잡아 보시라고 했다. 내가 아내의 손을 잡았더니 손은 그대로 차가왔고, ‘차갑다고 말했다. 구역장은 ‘1주일 더 열심히 기도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헤어졌다.

우리는 다시 그 일을 잊어 먹고 지냈는데, 구역장은 다음 주에도 똑같이 물었다. 나는 별 기대도 하지 않고 마지 못해 아내의 손을 잡았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아내의 손이 좀전에 꺼낸 삶은 계란처럼 따뜻해져 있었다.

몇 달이 지난 후 아내는 몸이 이상하다면서 한국인이 운영하는 작은 병원에 가 본다고 했다. 그리고 사무실로 전화가 오기를 임신한 것 같다고 해서 큰 병원에 가야 하니 예약을 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나이 서른 여섯에 끊어진 생리가 마흔 다섯에 되살아나 아기를 가졌고, 1997911일에 다섯째 딸을 낳게 되었다. 넷째 언니와는 아홉 살 차이이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태어난 새 아기 이름을 은수라고 지었다. 은혜 은()자를 넣고 싶었기 때문이다. 은수는 그후 이스라엘로 따라 가 3년 반을 살았고,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자기 일을 찾아 서울에서 1년 살다가 지금은 박물관에서 일을 돕고 있다.

아내는 그 후에도 계속 손과 발이 따뜻하여 일흔 살이 넘은 지금도 양말을 신지 않고 지낸다. 박물관을 준비하면서 어렵고 힘드는 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이 기적을 생각하면서 버티어 내었고, 개관은 하였으나 아직도 갈 길이 먼 지금도 종종 이렇게 기도한다.

처음 만난 새 구역장의 기도를 들으시고 제 아내의 손발을 따뜻하게 해 주신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지금 이 기도를 들으시는 줄 믿습니다.”

뉴질랜드에서 3년 내내 수집한 물건은 보잘 것 없으나, 사실 믿음보다 더 좋은 선물이 어디 있겠는가? 박물관에서 해설할 때마다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음은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내가 만났기 때문이다.

 

뉴질랜드에서 우리는 코히마라마에 살았고, 나는 가까운 리뮤에라 골프장의 멤버였다. 이 리뮤에라에는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에드몬드 힐러리 경이 살고 있어서 우리는 골프장에서 가끔 조우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88세가 되던 2008123일에 죽었다.

2008년 당시 미국에서는 또 다른 힐러리가 대선 주자로 활동하고 있었으므로 국민일보 10면에는 두 명의 힐러리 사진이 함께 게재되었다. 한 명은 힐러리 클린턴이고, 다른 한 명은 힐러리 경의 장례 행렬이었다.

에드몬드 힐러리가 해발 8848미터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르자, 힐러리 여사의 어머니는 힐러리 경의 이름을 따라 새로 태어난 딸의 이름을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힐러리 여사의 홈페이지에 가 보면 그는 19471026일생이다. 그리고 백과사전에서 힐러리 경을 찾아 보면 그가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날짜는 1953529일이다. 그러니까 힐러리 여사가 6살 때 힐러리 경이 정상에 오른 셈이다. 좀 더 자세히 조사해 보면 힐러리 여사의 이름은 그의 자서전을 대필하던 작가가 1990년대에 임의로 써 넣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내가 힐러리 여사에게 반하게 된 것은 이스라엘에서 그의 친필 서명을 보면서부터이다. 2003년 그가 이스라엘 케파르 사바 시청을 방문했을 때 방명록에 써 둔 'Hillary'라는 주먹만한 글씨는 정말 당당하고 군더더기 하나 없었다. '힐러리 클린턴'도 아니고, 그냥 '힐러리'였다. '힐러리처럼 일하고 콘디처럼 승리하라'라는 책에서도 그의 당당함과 야망을 읽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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