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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홀로코스트의 나라 폴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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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 한국 정부는 공산권 국가들과 무역사무소를 상호 교환하기로 합의하였고, 나는 바르샤바 무역사무소 창설요원으로 폴란드에 가서 3년을 근무했다. 사무실과 사택은 상대방 정부가 무상으로 제공하는 조건이었으므로 3년 내내 폴란드 정부가 제공하는 아파트에서 편안하게 잘 살았다.

413일 바르샤바 국제공항에 도착하여 폴란드 측 안내를 받으면서 임시 숙소인 빅토리아호텔로 가는데, 차창 밖으로 보이는 바르샤바 하늘은 온통 잿빛이었다. 건물들은 빛 바랜 시멘트 덩어리 그 자체였고, 도시 전체가 우중충하고 음산하였다. 길거리 사람들은 검고 두꺼운 옷을 입고 천천히 걸어 다녔고, 창문과 출입문에는 굵은 쇠창살을 매달아 스스로를 가두고 사는 듯 했다.

우리 가족은 안전과 생활여건을 살펴 본 후 부르기로 하였는데, 그러기를 잘 했다 싶었다. 특히 길거리에서 북한 대사관 차를 만날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출근 때부터 퇴근할 때까지 현지 직원이 에스코트를 하지만 주말까지 부를 수는 없었다. 나는 폴란드 외무부에 가서 불안하여 못 다니겠으니 도와 달라고 부탁했고, 몇 일 후 서류 한 장이 도착했는데 거기에는 ..민을 막론하고 이 서류를 읽는 폴란드인은 이 한국인을 보호하고 도와 주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우리는 이 쪽지를 마패라고 불렀는데, 3년 동안에 2번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가족은 두 달 후에 도착하였는데, 가족이 오기 전까지 나는 한국 음식은 없어도 견딜 만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리워지는 것은 한국말이었다. 그 때마다 나는 새로 장만해 간 단파 라디오 겸 녹음기 속에 들어 있던 시험용 카세트 테이프를 틀고 또 틀었다. 그 테이프에는 담다디라는 노래가 녹음되어 있었는데, 나는 그것만으로도 감사했다.

당시 폴란드는 쌀, 설탕, 고기, 소금, 성냥을 배급했는데 현지직원이 어디엔가 가서 가끔 그 배급표를 가져다 주었다. 가족이 도착했을 때는 다행히 배급 제도가 폐지되었지만, 대신 쌀은 하루 1kg만 구매할 수 있었다. 아내의 가장 큰 고통은 바로 이 알랑미 쌀을 구하는 문제였다. 어쩌다 쌀이 나오면 수퍼에 가서 긴 줄을 서야 했고, 저녁에 날이 어두워지면 옷을 바꿔 입고 가서 다시 줄을 서곤 했다.

다행히 이런 어려운 문제는 두어달 만에 끝이 났다. 생필품 쇼핑을 위해 한 달에 한 번씩 서독 프랑크프르트나 서베를린으로 출장을 갈 수 있도록 본부에서 배려해 주었기 때문이다. 프랑크프르트로 갈 때는 비행기를 타고 가므로 편하기는 하지만, 쌀을 많이 못 가지고 오는 단점이 있었다. 사무실 문방구와 비품을 사다 보면 금방 20kg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음 달에는 자동차로 서베를린으로 가곤 했는데, 폴란드 국경에서부터 서베를린까지는 고속도로에서 자동차 창문을 닫은 채 줄곧 달리기만 해야 했다. 정차할 경우에는 동독 경찰이 바로 연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도 그해 11월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자유로와졋다.

이런 독특한 시기에 하나님은 왜 나를 폴란드로 보내셨을까? 동구권 나라들이 40년 동안 철저하게 공산주의 시험을 당했다는 것은 또 인류 역사에서 무슨 의미일까? 그 때부터 나는 기독교 박물관 보다 동구권 박물관에 심취하게 되었다. 동구권 공산시대 유물들을 수집하기 시작했고, 동구권 박물관을 꿈꾸면서 설계도도 수없이 그려 보았다. 이때 수집한 물건들은 아직도 창고 한켠에 쌓여 있고, 당시의 비사(祕事) 메모들은 파일 속에서 잠자고 있다. 다행히 공산권 물건들은 비싸지 않아 큰 돈은 들지 않았다.

수집 물건 중에는 다행히 홀로코스트 유물과 성경 물건들도 많다. 예를들면, 미리암은 홍해를 건넌 후 여인들과 함께 손에 소고(小鼓)를 들고 춤을 추었는데, 폴란드에서 구입한 유대인 전통 소고는 탬버린과 비슷하다. 소고를 넘겨 준 유대인은 언어소통에 한계를 느끼자 미르얌, 미르얌이라고 외치면서 소고를 흔들어댔는데, 나는 그 말을 알아 듣고 그 자리에서 구하여 악기 코너에 전시해 두고 있다.

홀로코스트 유물로는 수용소에서 입었다는 푸른 줄무늬 유니폼과 가슴에 달았다는 노란 다윗의 별, 면도칼, 안경, 여행용 가방 등이 있다. 홀로코스트 시대의 유대인 부부 여권도 구할 수 있었는데, 부인의 여권에는 ‘Jedno(유대인)’라는 빨간 스템프가 찍혀 있다. 이 외에도 낡고 오래된 탈무드 책, 좀이 먹거나 헤어진 기도서 등이 있고, 큼직한 나무판에 새긴 최후의 만찬조각품도 박물관 제1관에 잘 전시해 두고 있다.

내가 폴란드에 도착하기 44년전, 그 곳에서는 600만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이 가스실로 끌려 가 죽었는데 당시 유럽에 살던 유대인들은 모두 950만명이었다. 나는 바르샤바의 유대인 겟토와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둘러 볼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생활이 떠올랐다.

 

폴란드는 평평한 땅이라는 말인데, 실제로 남쪽 일부 지역을 빼고 나면 그야말로 나라 전체가 평평하여 타타르 부족이 말을 타고 침입했을 때 속수무책으로 당했다고 한다. 그래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타타르 온다고 하면 울던 아이도 울음을 뚝 그친다고 했다. 그리고 타타르족이 먹던 육회는 지금도 폴란드 식당에서 인기 매뉴로 남아 있다.

폴란드 경제기획원은 한국의 경제 성장을 높이 평가하면서 국장급 이상 전 간부가 모인 자리에서 한국의 경제성장 비결에 대해 특강을 해 달라고 했다. 원고에는 당연히 한국의 경제개발 5년 계획과 수출의 날, 새마을운동이 포함되었다. 초가지붕을 벗기고 스레트지붕에 페인트 칠을 하면서 국민들의 마음에 희망과 용기가 생겼다고 소개하였다. 어쨌든 바르샤바의 거무칙칙하던 건물들은 놀라운 속도로 단장되기 시작하였고, 상가들도 빨간색이나 노란색으로 물들어 갔다. 이런 변화는 내가 근무하던 3년 안에 확연히 드러날 정도로 빠르게 일어났다.

변화는 그 뿐만이 아니었다. 폴란드 상공회의소와 협력하여 무역사절단을 한국으로 보냈더니 이들은 동대문시장 일대에서 앙골라 쉐타와 운동화 그리고 모조장신구 등을 구매하는 보따리상이 되어 돌아왔다. 한국 공산품에 매혹된 이들은 여행사를 끼고 자체적으로 전세기를 띄우기도 했다. 가는 곳마다 한국 물건이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고, 그 즈음에 삼성이 먼저 진출하여 전자제품 직판장을 만들었다. 이어서 현대, 엘지, 효성이 진출하였고 대사관도 들어 왔다. 그리고 남녀 유학생들도 줄지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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